폭설에도 교회를 닫을 수 없는 이유 (1-24-23)
지난 주일에는 예상치 못한 폭설로 교회들마다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우리교회는 문을 닫지 않았지만, 계획되었던 임원교육과 회의는 연기되었고, 점심친교도 준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아침일찍부터 교회에 나와 예배를 준비했습니다.
“눈이 이렇게 많이 계속해서 오고 있는데, 교회예배에 참석하실 분이 많지 않겠구나. 몇분이라도 오시면 가족처럼 예배드리자” 라는 생각으로 예배를 준비했습니다. 반주하시는 자매님도 올 수 없어서 반주없이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예배 30분전에 교회주차장을 보았을때도, 굵은 눈발은 기세가 꺽이지 않았습니다. 그 날씨에도 교회에 나오셔서 예배를 준비하시는 몇분들은 눈을 맞으면서 주차장의 눈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인데 말입니다. 저는 예배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사무실에 있으면서, 좀 민망하기도했고 참 감사했습니다.
예배 시작 15분전에, 본당 맨 앞자리에 앉아 기도했습니다. 몇분이 오시더라도 기쁘고 감사가득한 예배, 성령님의 임재가득한 예배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 강단에 올라섰을때, 약간 놀랐습니다. 평상시의 약 50% 정도의 교우님들이 예배에 나오신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 순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한 생각들이 스쳤습니다. 예배인도하는 중에 보니 한복을 입고 오신 여자 교우님들(두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구정 설날이라서 그러셨습니다. 그 모습도 감사였습니다. 또한 주일 점심식사대신에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따뜻한 호박죽을 만들어 오신 분, 정성을 담은 fruit cupcake을 만들어 오신 분… 호박죽과 컵케잌은 그 정성과 사랑만큼이나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폭설로 교회 문을 닫느니 여느니 하는 그 주일에, 우리는 그렇게 참으로 기쁨과 감사가 가득한 주일을 보냈습니다. 참으로 풍성한 주일이었습니다! 그 주일에 오신 교우님들에게도 마음 따뜻한 감동과 감사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종종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은혜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거라지 도어(Garage door)의 교훈 (1-13-23)
저희 사택에 거라지 도어에 문제가 생겨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았었습니다. 이리저리들여다 보면서 제 나름대로 수리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손에 검은 윤활유만 잔뜩 묻히고는 소득이 없었습니다. 도어를 작동하게 하는 부품을 교체해야 할 것 같아서 수리 비용도 신경쓰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기술자를 부르기로 하고, 도어기어를 풀어서 아예 문을 닫아놓았습니다.
지난 월요일 오전에 도어 기술자가 왔습니다. 도어를 손으로 들었다 내렸다 두번정도 반복하더니 윤활유 스프레이로 도어 곳곳에 뿌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그 순간 저는 “허”하고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부드럽게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고장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어가 꺾이는 조인트에 윤활유만 넣어주면 되는 것을 저는 고쳐보겠다고 고생만 했었습니다. 그 기술자도 출장수리 왔다가 그냥 가는 것이 민망했는지 오래된 작은 부품하나 교체하고 $124 청구하고 돌아갔습니다.
거라지 도어 소리가 얼마나 부드러워졌는지 모릅니다. 그 전까지는, 거라지 도어를 열고 닫을때에는 의례히 덜컹덜컹 거친 소음이 나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거라지 도어용 윤활유만 넣으면 이렇게 부드러워지고, 말끔히 해결되는 것을 말입니다. 몇일이 지났음에도 거라지 도어의 소리를 들을때마다 “참 부드럽네”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우리의 영적생활에도 문제가 발생할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를 써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영적생활에 기쁨이 회복되지 않고, 거라지 도어가 덜컹거리듯 삐걱거리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어느때는 기술자가 와야 고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예 손을 놓고 그럭저럭 교회생활하며 지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윤활유만 잘 넣어주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거라지 도어의 작동원리는 말씀이라고 비유하고 싶고, 그 작동을 원활하게 하게 하는 윤활유 역할은 바로 기도라고 비유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은 말씀을 따라 작동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라는 윤활유를 더해야 부드럽게 작동합니다. 만일, 기도가 점점 사라져 부족해지면, 영적인 삶에서 삐걱거리고 소음이 나며 후에는 고장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기도의 윤활유를 삶의 구석구석에 뿌려주십시오. 어쩌면 그것이 지금 삐걱거리고 답답한 삶의 해결방법일지도 모릅니다.
꼭 회복하세요! (1-5-23)
오늘은 기쁜 마음으로 시작한 날인 것 같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치료중에 있었던 두분의 교우님들이 치유되고, 회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늘 새벽기도회에서 교우님들께 전해드렸습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제 자신도 참 기뻤고 감사했습니다.
오늘 아침 막내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거리의 휴지/쓰레기를 주우시는 그분을 오랜만에 다시 뵐 수 있었습니다. 건강한 모습이셨습니다. 지난 12월 중순부터 뵐 수가 없어서 염려도 되었는데(두주간은 막내아들 방학이었음), 어제만 하더라도 뵙지를 못해서 마음이 안타까웠는데, 오늘 아침에 그분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그분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순간 너무 반가웠던 모양입니다. 그분이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을 보자마자 “허”하고 작은 웃음이 나왔습니다. 무어라 설명이 되지는 않지만, 제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뻤습니다.
어느 책 제목에서, 회복의 기쁨을 “찬찬히 환하게 이 보다 더 좋을순 없는”이라고 적은 것을 보았습니다. 내용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회복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다시 간절하게 원했던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복되었을때의 그 기쁨은 “찬찬히 환하게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는” 기쁨이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회복은 본인의 기쁨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까이에서 속앓이하며 애태웠던 가족들, 교우님들, 그리고, 제가 한번도 만난 적도 없던 그분의 회복에 기뻤던 것처럼, 회복은 이렇게 주변을 찬찬히 환하게 밝혀주는 작은 빛이 되고,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회복에도 이와같은 사회적 속성이 있음을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회복은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에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회복은 또 하나의 의무라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꼭 회복하십시오! 모든 질병에서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 깊이 패인 상처로부터 꼭 회복하십시오! 아니, 회복해야만 합니다. 빨리는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 몸과 내 영혼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며 아파하는 누군가를 위하여 말입니다. 훗날 그분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날을 소망하면서 말입니다!
거리를 청소하는 꿈! (12-15-22)
아침에 은겸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올때에는 항상 같은 길로 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간에 그 길을 따라 지납니다. 차량이 그리 많지 않아서 음악을 들으며 오는 그 시간은 나름 편안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매일 제 눈에 들어오는 한 분이 있습니다. 거의 동일한 장소에서 봅니다. 처음 이삼일 동안 그분을 보았을때는 혹 홈리스(Homeless)가 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후에 깨달은 것은, 이 지역에 홈리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없는지는 모르겠습니다)과, 그분은 한 사람의 평범한 시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70세 정도되어 보이는 그분은 하루도 빠짐없이(토/주일은 모르겠습니다) 왼손에 큰 비닐 쓰레기 봉투를 들고, 오른 손에는 긴 집게를 들고, 거리에 버려진 종이나 쓰레기들을 청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가오는 날에도 변함없이 그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훨씬 이전부터 늘 그 거리를 청소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요즘 독감이 많이 아프다는데 독감에 걸리신건가? 갑자기 무슨 일이 있으신건가? 내일은 나오시겠지… 혼자만의 염려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돌아왔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은 매일 아침 일찍 거리를 청소하는 것으로 자신의 남은 삶의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보면서 누가 버렸는지를 캐묻거나 비난하는 일에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그저 버려진 쓰레기를 청소함으로 이웃들에게 작은 기쁨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삶의 남은 시간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을 생각하면서 존경스러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훗날 저도 은퇴후에 건강이 허락된다면,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은퇴후에는 더 욕심이 많아지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그분처럼 매일 아침일찍 큰 비닐봉투를 메고 길거리로 나가 버려진 쓰레기를 청소하면 그것만으로도 은퇴후의 시간들이 좀 의미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이런 작은 꿈을 꾸어 보았습니다.
사소한 일상속의 동행 (12-13-22)
매일 아침, 저는 막내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줍니다. 둘만의 시간입니다. 짧지만 “함께”하는 시간이라서 참 좋습니다. 주로, 랩송(Rap Songs)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막내아들은 흥얼거리며 따라하는데, 저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지만, 스피커를 통해 우퍼의 강력한 베이스를 들으며 저의 귀도 즐겁습니다. 아들과 세대의 차이를 뛰어넘어 함께 같은 음악을 듣고 그 노래에 대해 아들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습니다. 가끔은 잔소리도 늘어놓습니다. 그 가사의 내용이 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해서 말입니다.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 이전 버지니아 맥클린에 대한 이야기, 형들이야기도 나눕니다. 그리고 가끔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면 아들의 표현대로, 저는 열심히 설교를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거부감없이 잘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최근 수개월전부터 “함께” 겪어야 했던 일을 통해서 믿음을 나누고, 그 믿음안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느껴서인 것 같습니다. 아직 teenager 이지만, “함께”라는 것이 이렇게 좋구나 생각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이렇게 “사소한 일상속에서 함께”하기를 기뻐하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즐거운 순간에도, 슬픈 순간에도, 걱정과 염려의 순간에도, 그리고 두려운 순간에도 “함께”하기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그저 “함께”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자꾸만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마르다보다 마리아가 선택한 편이 더 낫다(눅10:42) 하신것은, 우리가 마리아의 선택(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따르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공간안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언제나 만나주실 준비가 되신 분, 우리가 부를때에 “내가 여기있다” 말씀하시는 나의 아버지라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리 멀지 않은 훗날, 밝히 그분의 얼굴을 뵙는 그날까지, 우리는 그렇게 “사소한 일상속에서의 동행”을 이어가야겠습니다.
오하이오안(Ohioan)이 된지 한달! (12-1-22)
오늘은 12월 1일, 제가 데이튼 한인연합감리교회에 부임한지 딱 한달이 되는 날입니다. 이는 제가 오하이오안으로 생활을 시작한 지 한달정도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곳에 와서 제가 만난 분들중에 두세분에게서 동일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하이오에 오셨는데 어떤 느낌이세요?”
그 질문을 들을때마다 제가 조금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면, 질문했던 분들이 먼저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조용하죠?” “Calm하죠?” 그러면 저도 “예, 조용한 것 같습니다”라고 화답해 드렸습니다.
지난 한달동안 이곳에서 지내면서, 그리고 거리를 지나면서 정말 그리 화려하거나 요란스럽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의 말씀대로 비교적 조용하고 차분했습니다. 거리의 풍경들이나 자동차들도 그리 요란스럽지 않았습니다. 제가 주로 다니는 도로의 제한 속도가 35마일인데, 차들마다 약 40마일정도로 차분하게(?) 달리는 듯 합니다. *예외가 있습니다. Football에는 조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주로 클래식 FM Radio을 듣는데, 클래식 음악조차도 그리 요란스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듣기가 편하고 좋습니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고, 대체로 그렇습니다.
제가 이전에 살던 곳은 이곳에 비해 좀더 화려하고, 그리고 조금은 요란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고, 화려한 것보다는 거칠지만 수수하고 가식없는 것이 좋고, 요란스러운 것보다는 차분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인지, 이곳 오하이오의 삶에 그리 어렵지 않게 적응해 가고 있으며, 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용하고 수수하고 요란스럽지 않고 차분한 것을 “오하이오스럽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매우 좋다는 표현으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교회도 오하이오스러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겉치레와 화려함은 참 요란스러운 것 같습니다. 자기를 드러내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좀 거칠지만 순수하고 가식없는 신앙, 그런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흔히 “진국”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만, 누군가로부터 진정한 신앙인, 진짜 교회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그런 믿음, 바로 그 교회를 찾고 계실 것입니다.
오하이오안(Ohioan)이 된지 한달,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복음의 반댓말은 자랑입니다! (11-29-2022)
이 제목은, 오늘 아침 교회 사무실로 출근한 후 짧은 영상에서 들었던 어느 목사님의 외침이었습니다. “이런 교회는 절대로 가지 마세요“라는 제목의 영상이었습니다. 제목에 호기심(?)이 생겨 끝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합니다.
큰 건물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교회, 담임목사가 자기 입으로 자기는 유명하다고 하는 교회, 돈이 많다고 하는 교회, 유력한 인물들이 많다고 자랑하는 교회, 헌금 많이 나온다고 자랑하는 교회… 그런 교회는 절대로 가지 마세요!
그런 것 같습니다.
복음을 자랑해야 하는 교회가 세상의 가치와 힘을 자랑한다면, 그리고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는 교회가 그럴듯하고 화려한 행사들을 자랑한다면, 진정한 교회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복음의 반댓길을 걷는 모임 혹은 기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6:24)하셨는데, 교회라는 건물에서 두 마음을 품고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어찌 보실까요?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사야1장)들이 떠오릅니다. “교회”라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복음이 교인들의 마음과 영혼속으로 깊이 들어가 감격하며 그 은혜앞에 겸손해지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가장 중요한 기초일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복음외에 그 어떤 것도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자랑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교회”이기 위해서! 능력과 은사를 자랑했던 고린도교회와 같이 변질되지 않겠습니다. 오직 복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아래에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들을 자랑하고 추구하는 Institution이 되지 않고, 복음안에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힘쓰는 진정한 교회를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 이상, 썩어지고 사라질 것들을 손에 들고 자랑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고전14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을 들고 감격하며 자랑하는 진정한 “교회”를 세워나가기를 바랍니다.
갈급함
*아래의 글들은 test 용으로 올린 것입니다.
갈급함의 사전적인 의미는 “필요를 몹시 (급히)바라는 마음”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필요를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저 영적인 필요를 느끼는 정도라면, 그것은 “갈급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갈급함은, 영적인 필요를 “몹시 (급히)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갈급함”을 잊어버린 듯합니다.
성경속에서 시편42편1절의 말씀은, “갈급함”을 가장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개역개정)
물이 귀한 광야에서는 사슴이 물을 얻지 못하면, 괴로워하면서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물 한 모금을 얻기 위한 갈급함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 지입니다. 생수이신 주님을 향한 영혼의 갈급함이 있을 때, 우리의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땅만 파다가 죽어갈 것입니다.
영혼의 갈급함은 한 번의 해소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시편 105편 4절에서는,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 지어다”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항상”은, 지속적으로 구하는 영적인 갈급함을 말합니다. 이전의 한두 번의 영적인 경험이 있었다고 영혼의 갈급함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향을 향하여 광야의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향에 이를 때까지 영혼의 갈급함으로 생수이신 주님을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마치, 광야의 땡볕에서 “몹시 (급히)바라는 마음”으로 생수를 찾고 또 찾듯이, 우리도 영적인 갈급함으로 주님을 찾고 또 찾아야합니다. 그것이 이 광야길에서 내영혼이 사는 길입니다.
“교양있는” 이상주의
“Educated” Idealism
미국의 3 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이 살다가 죽은 몬티첼로(Monticello, VA)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곳을 다녀온 후, 토마스 제퍼슨에 대해서 좀 더 찾아보았습니다. 그는 영어를 포함한 6 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학자요
과학자요 건축가요 음악가요 변호사이며 정치가였습니다.
프랑스대사를 역임한 그는, 계몽주의 철학에 심취하였고, 정치가로서의 이상주의를 실현하고자 했었습니다. 그래서 인권을 중요시하고,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며 만인 평등을 주창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보면, 그가 가졌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물론 그의 단편적인 삶의 모습입니다만,
그의 농장에는 200 여명의 노예들이 있었는데, 그는 죽기전까지도 자기 노예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다. 흑인노예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두기도 했습니다. 또한 원주민들에게 강제로 백인 문화를 주입시키고, 자기 영토를 지키려던 원주민들을 가차없이 살육했던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가졌던 이상은 “교양있는” 이상주의였습니다. 저는 그의 삶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교회생활을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교회에 대한 이상과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오직 주님의 뜻만이 세워져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사랑이다. 교회는 하나 되어야 한다. 오직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그 이상과 꿈들을 구체적으로 이루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교양있는”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각하는 머리와 말을 하는 입이
있습니다만, 움직여야 하는 손과 발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작은 것에서부터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교회로 변화하기 위하여 말입니다.
Last Monday Ungsoo Academy went on a Fall outing to Monticello, VA to visit the estate of
Thomas Jefferson who was the 3rd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ofAmerica. After the trip, I
researched a bit more about him. He was fluent in six languages including English and a scholar,
scientist, musician, lawyer and politician.
He, once served as the ambassador to France, was engrossed in the Enlightenment and
tried to realize idealism as a politician. Therefore, he regarded human rights important and
asserted that everyone is equal, “All men are created equal.”
His life, however, was far from his idealism. Of course, it is one glimpse of his life, but he
owned two hundred slaves in his plantation, and he didn’t emancipate them in his lifetime. He had
an illegitimate child from a slave woman. It was known that he was involved in forcing white
cultures upon American Indians and slaughtering those who tried to defend their territory. His
idealism was “educated” idealism. As I was reading about him, I reflected our church life.
We have an idea and dream for our church: “Church should be holy; only the will of the Lord
should be realized; the essence of church is love; all the churches should work as one; and we need
to live for the Lord.”
But we can’t help asking ourselves if we are working toward the realizat ion of such dream
or only have “educated” idealism. We have a brain that thinks and a mouth that speaks, but we
shouldn’t forget we have hands and feet we should move.
Now as Christians, we ought to move our hands and feet toward small things in order to
cultivate our church as a beautiful church we are dreaming of
노래가 주는 치유와 회복
Healing and Recovery that Songs Provide
지난 수요일 오전, 어느 속회 심방 약속이 있어서 제 아내와 함께 갔습니다. 약 30 분 운전을 하고 가는 중에, 제 마음속엔 표현할 수 없는 어둠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속회 드리는 집에 도착을 하고 교인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그 어두운 마음을 잠시 잊었었습니다.
속회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식탁에 둘러앉아 먼저 찬송가 301 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늘 부르던 찬송이기에 별다른 느낌이 없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 마음속에 있던 어둠이 점점 사라지고, 굳어있던 마음이 서서히 편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눈을 감고 찬송했습니다. 마음속의 어둠이 물러가는 것을 좀더 분명하게 느끼고 싶었습니다. 눈을 감고 찬송하면서, “아! 찬송에는 이런 힘이 있지…”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지난 주 부흥회 메시지로 이어졌습니다. 노래가 주는 치유와 회복!
노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찬송은 제 마음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사 52:9)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시 98:1)
저의 작은 경험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습니다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저와 같이 찬송의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찬송이 있는 주일예배에서 모든 교인들마다 찬송이 주는 치유와 회복을 한 번 경험하시면 좋겠습니다. 찬송을 통해서 마음을 만져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은혜가 가득한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Last Wednesday morning, I visited a small group with my wife. While driving for about 30
minutes to the hosting house, darkness overshadowed my heart. Soon after arriving the
destination, while exchanging greetings with the small group members, I briefly forgot about the
darkness in my heart.
We started the worship with singing Hymn 301, “God’s great grace it is has brought us.”
Because I am so used to sing this hymn, nothing special was going through my heart. However,
unbeknownst to me, the darkness in my heart was fading away and I was slowly feeling peaceful.
To feel more clearly about what’s going on in my heart, I closed my eyes and sang. While singing
with my eyes closed, I thought, “Indeed, there’s such power in praising.” My thoughts naturally
continued on to the message from last week’s revival, which was “Healing and Recovery that Songs
Provide. I gave thanks to God who blessed us with songs. That hymn was God’s hands that touched
my heart.
“Burst into songs of joy together, you ruins of Jerusalem!” (Isaiah 52:9a)
“Sing to the Lord a new song.” (Psalm 98:1)
Although I cannot generalize my small experience, I cannot help but think that like me, many
Christians must be living with blessed experiences of praises. Therefore, when we sing praises
today during worship, I hope everyone would experience healing and recovery. I pray through
singing praises, our worship is full of grace which we experience God’s touch on our heart.